Jun 1, 2009

선덕여왕

Jun 1, 2009
역사에서 그냥 우리 나라에도 여왕 3명이 있었다는 것만 역사시간에 배웠지만 정확히는 잘 몰랐는데
요즘 뜨고 있는 선덕여왕때문에 자료를 찾아봤다.
드라마 초기라서 고현정의 미실이라는 역활 자체가 커다란 임펙트였기때문에 3회까지 보고서도 굉장히 매력적인 드라마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미실이야기를 토대로 한것인지 소설 미실을 토대로 만든 건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선덕임에도 미실의 카리스마로 첫편부터 흥미진진해졌다.
청순녀의 대표주자인 고현정이 변신하기에는 딱 맞지 않을까?
조연을 선택한 고현정 매우 현명한데????
요즘엔 악녀가 멋있어 보인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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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27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고, 휘(諱;임금의 이름)는 덕만(德曼)이며, 호는 성조황고(聖祖皇姑)이다. 시호는 선덕이다. 진평왕(眞平王;재위579-632년)의 맏딸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632년 왕위를 계승하였다.

632년 2월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5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10월에 왕은 각지로 사람을 보내어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 등 혼자 힘으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여 주었다.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33년 정월에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으며 여러 주·군(州郡)의 1년간 조세[租調]를 면제해 주었다. 2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634년 정월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다.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만 하였다.

635년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되었다. 10월에 이찬(;2등급)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또는 용춘(龍春)이라고도 하였다.>를 보내 주·현을 두루 돌며 위문하였다.

636년 정월에 이찬(;2등급) 수품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월에 왕이 병들었는데, 의원을 불러 약을 쓰고 기도를 올렸으나 효력이 없었다. 황룡사에 백고좌회[百高座會;《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읽으면서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불교 법회를 말함]를 마련하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읽게 하였으며, 1백 명의 사람들에게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5월에 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玉門池)로 모여들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에게, "두꺼비와 개구리는 눈의 생김이 성난 것 같으니, 이것은 군사들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방에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의 징조를 보니 반드시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침범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무찌르게 하였다. 알천 등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과연 왕의 말과 같이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옥문곡에 숨어 있었다. 알천 등은 적을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637년 정월에 이찬(;2등급) 사진(思眞)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았다. 7월에 알천(閼川)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638년 3월에 칠중성(七重城)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보(步) 옮겨갔다. 9월에 누런 꽃이 비처럼 내렸다.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閼川)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11월에 알천(閼川)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639년 2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8등급) 진주(眞珠)에게 명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7월에 동쪽 바닷물이 붉게 되고 또 더워져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

640년 5월에 왕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당] 태종(太宗)은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를 많이 불러 모아 학업을 가르치는 관원(官員)으로 삼고,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들러 그들로 하여금 강론케 하였다. 학생으로서 대경(大經) 가운데 하나 이상에 능통한 사람은 모두 관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하고, 학사(學舍)를 1천2백 칸으로 늘려 지었으며 학생을 늘려 3,260명에 차게 하니,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경사(京師)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고구려, 백제, 고창(高昌), 토번(吐蕃) 역시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642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8월에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2등급) 품석(品釋)과 사지(舍知;13등급)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2등급) 김춘추(金春秋;후에 태종무열왕)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長蛇封豕]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 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보낼 수 있다.” 춘추가 대답하였다

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하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고장(高臧)[보장왕]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삼았다.

643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배우던 고승 자장(慈藏)이 돌아왔다.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저희 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그것을 빼앗고자 장차 이번 9월에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저희 나라의 사직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므로, 삼가 신하인 저를 보내 대국에 명을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약간의 군사를 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태종(太宗)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의 나라가 두 나라로부터 침략받는 것을 매우 애닯게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들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돌아서자마자 생각을 뒤집어 너희 땅을 집어삼켜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 그대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써 망하는 것을 면하려고 하는가?

사신이 대답하였다. “우리 왕은 일의 형편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여 오직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대를 조금 일으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곧장 쳐들어가면 그대 나라는 저절로 풀려 1년 정도의 포위는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군대가 없음을 알면 도리어 침략을 멋대로 하여 네 나라가 함께 소란해질 것이니, 그대 나라도 편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계책이다. 나는 또한 너에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는데, 두 나라 군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세워 진열해 놓으면 그들이 보고서 우리 군사로 여겨 반드시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계책이다. 백제국은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럽게 섞여 서로 즐기며 연회만 베푸니,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땅을 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의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삼되, 자신이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호위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 한다. 이것이 세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잘 생각해 보라. 장차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사신은 다만 “예”라고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황제는 그가 용렬[庸鄙]하여 군사를 청하고 위급함을 알리러 올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하였다.

644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太宗)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주어 말하였다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조공을 빠뜨리지 않으니, 너희 백제는 즉시 군사를 거둠이 좋을 것이다. 만일 또 다시 그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반드시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그러자 [연(淵)]개소문(蓋蘇文)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 예전에 수나라가 잇달아 침입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500리 땅을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땅을 돌려주고 성을 반환하지 않으면 이 전쟁을 아마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거슬러 올라가 논할 것까지 있습니까?”라고 말하였으나, 연개소문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9월에 왕이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크게 이겨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에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또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왕이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유신은 마침내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2천 명을 목베었다.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또 백제가 다시 침입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왕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공(公)의 한 몸에 달렸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가서 이를 도모해 주시오.” 유신은 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여 서쪽으로 가는 길에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집안의 남녀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갔다. 3월에 황룡사탑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자장(慈藏)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여름 5월 [당] 태종(太宗)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왕이 군사 3만 명을 내어 그를 도왔다. 백제가 그 빈틈을 타서 나라 서쪽의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다. 11월에 이찬(;2등급)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647년 정월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다. 그리고 정월 8일 여왕이 신병으로 후사없이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4촌이며 진평왕(眞平王;재위579-632년)의 친동생 갈문왕 국반(國飯)의 딸이 진덕여왕이 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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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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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실(朴美室, 550년경[1] ~ ?)은 신라 시대의 권력자로, 화랑세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대원신통의 계승자였다고 한다.
생애
미실의 생애에 관해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편집] 화랑들과의 관계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제 2대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와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妙道夫人)의 딸이자, 제 10대 풍월주 미생랑의 누나이다. 사다함(5대 풍월주)과 사랑하는 사이었으나, 진흥왕의 생모 지소태후에 의해 지소태후와 이사부(태종, 苔宗)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세종(世宗)(6대 풍월주)과 결혼하게 된다. 사다함은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청오가'(靑烏歌)를 부르며 슬퍼하다가 죽었다.

이후 세종은 사다함의 종제 이화랑의 추천으로 6대 풍월주가 되었으며, 훗날 미실의 애인이 되는 설화랑이 세종의 보좌를 맡는다. 이 날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라고 말하더니 과연 미실은 얼마 뒤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편집] 진흥왕 시절
이후 미실은 지소태후를 통해 진흥왕의 후궁이 된다. 이때 진흥왕의 왕후인 사도왕후(思道王后)는 미실에게 "네가 태자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라고 말하며, 진흥왕의 태자이자 자신의 아들인 동륜과도 정을 통하게 하였다. 또한, 남편 세종이 출정을 한 틈을 타, 세종의 보좌인 설원랑은 물론 자신의 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한다. 진흥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미실을 총애하여 원화 제도를 29년만에 부활시키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이러한 관계는 한동안 들통나지 않고 유지되다가, 동륜이 진흥의 첩 보명궁주를 범하기 위해 담장을 넘다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마무리된다(572년). 이 일로 인해 미실과 동륜의 관계가 들통나고 미실과 세종은 궁 밖으로 쫓겨남은 물론, 미실과 세종은 각각 원화와 풍월주에서 물러난다.(풍월주는 설원랑이 계승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진흥왕은 미실의 처소를 드나들었으며, 심지어 이후 미실이 옥종공을 출산할 때가 되자, 그를 마복자로 삼는다.


[편집] 진흥왕 이후
진흥왕의 애첩이 된 미실은 이후 진흥왕이 병에 걸리게 되자, 국정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진흥왕의 아들인 금륜(진지왕)과 정을 통하여 왕후가 될 준비를 하는 한편, 사도태후와 함께 손을 써 진지왕을 왕위에 올린다. 그러나 막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후의 자리는 미실이 아닌 지도부인(知道夫)에게 돌아간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미실은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과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된다.

이후 진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는 미실과 논의하여 진지왕을 폐하고, 자신의 오빠인 노리부공(弩里夫公)에게 국정을 맡겼다. 노리부공은 세종과 짜고 왕위에 오를 계획을 세웠으나 다른 화랑들의 반대와 사도태후의 만류로 인해 왕위는 포기하고 대신 미실을 다시 원화로 세우고 세종을 국선(國仙), 노리부공에 반대했던 화랑 문노(文弩, 8대 풍월주로 어머니가 가야 사람이다.)를 아선(亞仙)으로 삼았다. 이후 미실은 설원랑과 문노의 사이를 중재하여 문노 역시 미실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이후 문노가 아선의 자리로 풍월주가 되었으므로 이를 화선(花仙)이라 칭했다.

진평왕 7년인 585년 자신의 동생인 미생이 10대 풍월주가 되자 미실은 하종으로 하여금 부풍월주가 되게 하였다. 3년 뒤에는 하종이 미생의 뒤를 이어 11대 풍월주가 된다.

만년에는 중이 되었다고 하며, 수많은 남성들 중 설원랑과의 관계를 가장 진실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다. 설원랑과의 사이에는 보종공(寶宗公)을 낳았다.


[편집] 문화에 나타난 미실
《미실》 : 김별아의 장편소설. 2005년 작으로, 제 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ISBN 8974562707
드라마 《선덕여왕》 : 고현정이 미실 역을 연기한다.

[편집] 참고 문헌
원동석, 〈화랑세기를 통해 본 신라인의 성풍속 3〉, 미술세계 2006년 7월, pp96~99, 2006
정태현 역, 《화랑세기》,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제 10집, pp325~350,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9

[편집] 주석
↑ 미실의 남동생 미생랑이 550년생이다.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B%AF%B8%EC%8B%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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